File:영종사마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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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조선 제21대 왕인 영조(英祖)가 영조 46년(1770) 7월 사옹원(司饔院)을 방문하여 어제친서(御製親書)와 구마(廐馬)를 하사하자 이 자리에 참석한 사옹원의 고위 관료들이 이를 기념하여 만든 기록물(記錄物)이다.

영조는 재위 46년(1770) 7월 4일 사옹원을 방문하였다. 이때 영조는 사옹원의 제조(提調) 5인을 참석하게 하였다. 영조가 이처럼 사옹원을 방문하게 된 것은 자신이 16세 때 사옹원의 제거(提擧)로 임명되어 몸담은 바 있었고, 이로부터 61년의 세월이 지난 당시의 시점에서 옛 사옹원 시절의 회상과 감회가 간절하였기 때문이다.

 사옹원은 왕의 식사와 궁중 안의 음식물 공급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관청이다. 제단(祭壇)에 사용할 과일이나 농산물을 관리하고, 왕에게 올리는 지방 특산물을 관장하는 것이 그 임무이다. 조선초기부터 있었던 사옹방(司饔房)을 세조 13년(1467)에 개편하여 사옹원(司饔院)이라 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자문직으로는 도제조(都提調) 1인, 제조 4인, 부제조(副提調) 5인, 제거(提擧)·제검(提檢)을 합쳐 4인을 두었다. 또한 실무직으로는 정(正) 1인, 첨정(僉正) 1인, 판관(判官) 1인, 주부(主簿) 1인, 직장(直長) 2인, 봉사(奉事) 3인, 참봉(參奉) 3인 등이 있었다. 제거(提擧)는 조선시대 사옹원(司饔院)·내의원(內醫院) 등 여러 관서의 정·종3품 관직을 말한다. 녹봉(祿俸)이 지급되지 않는 무록관직(無祿官職)으로서 관료의 신분만을 갖는 자리였다. 조선 초기에는 내의원·상림원(上林園) 등 다수의 관청에 설치되었으나 세종 30년(1448) 이후 대부분 폐지되고 사옹원에만 두게 되었다. 
 당시 76세의 영조는 사옹원의 제거(提擧)로 있었던 과거에 대한 감회를 표현하고, 자신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하여 사옹원의 관료들에게 어찬(御饌)을 하사하였고, 자신이 짓고 쓴 어제(御製)와 함께 구마(廐馬)를 5인의 사옹원 관료들에게 각각 내려주었다. 이에 영조의 하사품(下賜品)을 받은 사옹원 관리들은 영조에게 전문(箋文)을 올려 사은(謝恩)의 뜻을 밝히고, 이를 기록하여 전가(傳家)의 보물로 삼기 위하여 만든 것이 이 「영종사마도」이다. 
 「영종사마도」의 바탕은 두꺼운 한지(韓紙)이며, 원래의 원형(原形)은 족자(簇子)였지만, 후대에 액자(額子)로 다시 장황(粧潢)한 것으로 보인다. 전체 지면(紙面)을 상하로 양분하여 상단에는 그림을 그렸고, 하단에는 관련 기록들을 필사(筆寫)하였다. 글은 오른쪽으로부터 어제(御製)·전문(箋文)·서문(序文)·좌목(座目) 등의 순서로 기록하였다. 장문(長文)의 어제(御製)에는 영조가 당시 제거(提擧)의 임무를 의욕적으로 수행하면서 큰 자부심을 가졌던 사실과 당시의 행적에 대한 추억들을 기록해 놓았다. 전문(箋文)은 신하들이 올린 송축(頌祝)의 내용을 담은 글이며, 서문(序文)은 이익정(李益炡; 1699-1782)이 이 계축(稧軸)을 만들게 된 경위를 간략히 쓴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 모임에 참석한 6인의 이름을 적은 좌목(座目)을 두었다. 좌목에 적힌 6인의 인적사항은 다음과 같다. 
          
         都提調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 臣 김상철(金尙喆) 
         提調顯祿大夫海運君 臣 연(槤) 
         提調顯祿大夫鶴城君 臣 유(楡) 
         提調輔國崇祿大夫行判敦寧府事 臣 이익정(李益炡) 
         副提調嘉義大夫行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藝文館直提學尙瑞院正 臣 
            구윤옥(具允鈺) 
         □直郞廳朝奉大夫主簿 臣 황인염(黃仁廉) 
 좌목의 명단이 기존의 계회도와 다른 점은 자신들의 이름 앞에 ‘신(臣)’자를 붙인 것이다. 이는 이 「영종사마도」가 왕에게 올린 어람용(御覽用)으로써 영조에게도 한 점이 진상(進上)되었음을 추측하게 하는 단서이다. 
 이 「영종사마도」는 기록화 중에서도 계회도(契會圖)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이익정(李益炡)의 서문(序文)에 “이에 계족(稧簇, 契會圖 簇子의 약칭)을 각각 장황(粧潢)하여 손을 씻고 삼가 발문(跋文)을 썼다[於是 各粧稧簇 盥手敬跋]”고 한 대목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즉 어람용(御覽用) 족자와 별도로 5인의 제조들도 각각 한 점씩 「영종사마도」를 소유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형식의 사례는 계회도의 여러 유형 가운데서도 사연도(賜宴圖)의 일종으로 구분된다. 즉 왕으로부터 연회(宴會)나 물품(物品)을 하사 받은 영광을 기념하여 이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 바로 이런 유형에 속한다. 그런데 이 「영종사마도」는 왕이 참석해 있는 장면을 내용으로 한 계회도라는 점에서 매우 주목되는 자료이다. 사은(謝恩)을 기념한 대부분의 계회도(契會圖)에는 왕의 어좌(御座)가 등장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영종사마도」는 왕이 친임(親臨)한 장면으로 그려져 있다. 이러한 점은 18세기에 활성화된 궁중기록화(宮中記錄畵)의 영향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왕은 친림해 있는 상황이지만, 그림에서는 왕의 모습을 그리지 않는 것이 관례였던 듯하다. 즉 왕의 모습을 그리는 것은 불경(不敬)한 행위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좌(御座)만을 묘사한 것은 곧 왕이 친임(親臨)하여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된다. 
 「영종사마도」에 그려진 건물은 사옹원 청사(廳舍)로 추정된다. 외곽건물을 중심으로 하여 청사의 안은 내부의 구조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부감법(俯瞰法)으로 조망하였다. 특히 중앙의 건물에 차일(遮日)을 친 것은 연회의 현장임을 시사한다. 왕과 관료들이 좌정(坐定)한 내부에는 중앙의 소실점(消失点)을 향하며 앞이 넓고 뒤가 좁은 원근(遠近)의 투시공간(透視空間)이 잘 표현되어 있다. 어좌(御座)의 주변에는 수행원들이 서있고, 좌우측에는 관료 3인이 各床을 받고 앉아 있다. 또한 왕과 대신들이 앉은 공간은 건물의 기둥에 의해 세 부분으로 분할되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건물과 인물의 묘사는 비교적 정교하고 꼼꼼하게 그려져 있다. 이 건물의 주변에는 수행원들과 임금이 타는 여(輿)가 놓여져 있어 현장감의 표현이 한층 돋보인다. 화면(畵面)의 아래쪽에는 사방이 트인 건물 좌측에 말 4마리가 겹쳐서 그려져 있고 관원들이 고삐 끈을 붙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구마(廐馬)가 내려졌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설명해 놓았다. 「영종사마도」의 인물과 건축물의 묘사는 화려한 과장적인 표현은 없지만, 부분적으로 서양화(西洋畫)의 투시법(透視法), 원근감(遠近感)의 설정 등이 잘 표현되어 있다. 
「영종사마도」는 사옹원의 관료들이 주체가 되어 제작한 계회도로서 사은(謝恩)의 의미가 담긴 기록과 그림의 표현 역량 및 제작 수준이 가장 높았던 영조대(英祖代) 기록화(記錄畵)의 특징을 잘 예시해 주는 대표적인 자료이다.
Date
Source 국립중앙도서관
Author 김상철(조선) 등 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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